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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꿈나무 첫그루의 감동적인 소식이 보도되자, 1979년까지 6그루의 겨레 사랑의 꿈나무가 심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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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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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돈씨 ---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고국에 |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냈던 김상돈(金相敦)씨 (1986년 작고)는 1972년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틈틈히 모았던 130만원을 꿈나무재단으로 내 놓았다. 그는 나의 마음은 늘 조국과 같이 있다는 마을 남기고 고국을 떠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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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수씨 --- 학교를 세우는데 써 달라. |
13세때 집을 나와 머슴살이와 막노동등 고된 생활을 한 오광수(吳光洙)씨 (1978년 작고)는 못 배움 설음을 뼈저리게 느껴, 불우한 학생들을 가르칠 학교를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구두쇠, 노랭이 소리를 들으면서 근근히 모은 돈을 1974년부터 1977년에 이르기가지 4회에 걸쳐 선뜻 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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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해호씨 --- 기술인 후세 양성에 도움되고자‥‥ |
미국에서 공학박사가 된 주해호(朱海浩)씨는 고국의 기술산업 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귀국, 후세들에게 한가닥 보탬되도록 노력하겠다고 1977년과 1994년의 2회 꿈나무기금을 기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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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기씨 --- 불우 청소년을 돕겠다. |
젊은 시절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김중기(金重基)씨는 불우학생이 공부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1978년부터 5회에 걸쳐 기금을 기탁하였다.
또한 김중기씨는 1986년5월부터 2002년8월까지 16년간 동아꿈나무재단의 감사직을 맡아 재단의 발전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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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승욱씨 ---- 원호대상 자녀들에게 용기를 |
동양화가인 허승욱(許承旭)씨는 군 복무때 중상으로 2급 상이 용사임에도 굳은 의지로 농장도 경영하는 한편 왼손으로 그린 그림 전시회를 열어 수익금 일부를 1978년과 1985년의 2회에 걸쳐 불우 원호대상자 자녀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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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실씨 ---- 정신지체 장애 아동을 위해 |
여의사로 산부인과를 운영하는 박양실(朴孃實)씨는 무료 산부인과를 설립하는게 꿈이라고 80년대 초에 3년만기 1000만원짜리 산업채권을 기탁하고, 그 뒤 1993년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7회의 성금을 기탁하면서 신체 장애 아동 돕는데 보탬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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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1971~1979년까지 꿈나무 기금 초기의 기틀이 된 분이다.
이 감격스러운 겨레 사랑 정신이 보도되자 8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에 동참하고자 하는 독지가들이 폭발적으로 불어났다.
80년 이후의 꿈나무기금 기탁자들도 한결같이 겨레의 후손들을 위해서라는 공통된 신념으로 출연하였기에 전부 예거하는 것은 생략하고 남다른 동기가 있어 출연하게 된 것을 모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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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자 이모저모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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